제텔카스텐으로 글 부자 되기
왜 제텔카스텐인가?
글쓰기를 좋아한다. 나처럼 내향형에, 집돌이에, 금붕어 기억력을 소유하고, 꾸준히 공부해야하는 직업을 갖고있는 사람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취미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선호하는 두 명의 SF작가, 테드 창과 켄 리우가 프로그래머 출신으로 동일한 이력을 가졌다는 우연에 매료되어 글쓰기가 일종의 사명감처럼 되어버린것도 있다. (둘 다 중국계 미국인이기도 하다) '글쓰기와 코딩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켄 리우는 이 둘이 '현대의 기호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려버리긴 했지만, 아직 테드 창의 생각은 듣지 못했고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어서 계속해서 밀어붙이고 있다.
야속하게도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에는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좋아하지만 자주 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내게는 글쓰기가 그랬다.
글쓰기를 습관화하지 못한데에는 게으름도 있겠지만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글감이라는 인풋이 있을 때 이것을 글이라는 아웃풋으로 산출해내는 과정이 지난하게 여겨질 때가 많았다. 글감이란게 떡 하니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날것의 데이터를 유용한 글감으로 가공해내야만 한다는 점도 부담이었다. 게다가 글감이 생겼다고 글이 술술 써지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겨우 여기서 부터가 시작이니깐.
인풋은 꾸준히 있었다. 기술문서를 살펴본 것에서부터 책, 영화, 유튜브에서 얻은 정보 모두가 마음만 먹으면 글로 잘 다듬어서 그럴듯한 아웃풋이 되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고 인풋은 휘발되기 마련이었다.
인풋이 들어오면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아내고 싶었다. 가끔가다는 글로 생각을 정리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등의 성과도 내고 싶었다. 이러한 욕구는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가슴 한 켠에 품고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글쓰기의 효능은 거듭 강조해도 모자라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 또한 많지 않으리라 믿기에. 단지 실천이 어려울 뿐. 그렇다면 제텔카스텐은 여기에 딱 맞는 방법론이다.
제텔카스텐이란,
제텔카스텐은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사회학자가 고안해 낸 체계이자 시스템이다. 제텔카스텐을 직역하면 '메모상자'라는 뜻인데, 자신이 습득한 지식, 정보를 메모 형태로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는 일종의 외부 기억 장치다. 요즘 말로는 세컨드 브레인, 제 2의 두뇌라고 할 수 있겠다. 루만은 메모상자를 단순한 기억장치로만 활용하지 않고 글 쓰는데 특화된 프로세스로 발전시켰다. 덕분에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려 60권의 책과 300여 편의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제텔카스텐의 프로세스를 간략히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새로운 지식이 생기면 메모 형태로 정리하여 메모 상자에 추가한다. 이 때 기존의 메모들 중 새로운 지식과 연관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 (반복학습을 통한 기억강화 효과가 발생하는 지점) 연관되었다면 번호를 매기는 방식 등을 통해서 서로를 연결짓는다. (학습은 새로운 정보를 기존 정보와 연결하는 것) 이렇게 형성된 지식 네트워크는 연상 그물망으로서도 기능하여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이 쉽게 교류하고 창의성이 발현되는 것을 돕는다. 관련해서는 '제텔카스텐의 효능'에서 부연한다.
제텔카스텐은 임시메모, 문헌메모, 영구메모로 구성된다. 임시메모는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포착하는 용도로 휘갈겨 적는 메모다. 하루 이틀 뒤에 재고해봐도 그 아이디어가 유용하다면 보관하고 유용하지 않다면 버린다. 문헌메모는 다른 매체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본격적으로 기록하는 메모다. 원본을 인용하면서 그에대한 나의 생각까지 덧붙이면 좋다. 그리고 영구메모는 임시메모와 문헌메모로부터 정수를 추출한 것이다. 임시메모와 문헌메모는 영구메모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구메모는 한 두줄의 간결하고 명료한 나만의 문장으로 지식을 표현하다. 여기에는 임시메모나 문헌메모로부터 이 지식의 근간의 되어주는 텍스트를 인용할 수 있고, 다른 영구메모와의 연결사항이 드러나야 한다.
특징1) 아날로그-디지털 친화적
20세기를 살았던 니클라스 루만은 아날로그 방식의 메모상자를 활용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노트 앱을 활용하여 제텔카스텐을 구현할 수 있다. 제텔카스텐을 구현하기 위한 용도로 탄생한 앱들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앱에서도 구축할 수 있을만큼 유연한 게 제텔카스텐의 특징이다.
니클라스 루만은 메모 귀퉁이에 적은 일련번호와 메모 간 물리적인 거리 등을 통해서 메모를 연결하곤 했다. 하지만 디지털에서는 백링크를 통해 쉽게 연결할 수 있다.
특징2) 비선형적 연결 (+MOC)
제텔카스텐을 알기 전부터도 디지털 노트앱에 학습한 것들을 기록했었다. 에버노트, 노션, 굿노트를 활용하여 효율을 뽑아내려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계층을 갖는 컴퓨터 디렉토리에 종속되어 지식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한 탓이다.
폴더는 계층으로 나뉘어진다. A 폴더 안에 AA 폴더가 있고 그 안에는 AAA 폴더가 또 자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명확히 구분된 계층이 지식들 간 연결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AAA 폴더 안에 있는 AAA1 메모가 BBB 폴더 안에 있는 BBB1 메모와 연관성이 있으리라곤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폴더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고 경직된 계층 구조다. 폴더가 갖는 선형적인 한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선형적 계층 구조는 지식 네트워크 형성을 방해한다. 디지털에서 비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지만, 가능한 폴더의 depth를 최소화하고 flat하게 유지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계층 구조를 불분명하게 유지하면, 메모간 연결 가능성이 높아지고 어떤 위치에 있는 메모와 연결되어도 어색하지 않게 된다.
폴더의 선형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비선형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MOC(Map Of Contents)를 활용할 수 있다. MOC는 비선형적으로 자유롭게 위치하고 있는 메모들을 링크를 통해 한 곳에 그룹화할 수 있다. 메모들의 비선형성을 유지하여 연결 가능성을 높히고, 그러면서도 그룹화를 통해 어떤 지식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것이다.
MOC를 중심으로 관련된 지식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한 모습
특징3) 상향식 글쓰기
일반적인 글쓰기는 하향식이다. 먼저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정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한 뒤 백지상태에 글을 써내려가는 방식이다.
제텔카스텐을 활용한 글쓰기는 상향식이다. 먼저 지식 네트워크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제텔카스텐의 효능
1. 제텔카스텐은 그 자체로 학습을 돕는다
a. 영구메모 작성은 그 자체가 글쓰기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학습 효과를 보게된다. 우선, 메모를 작성함으로써 머릿속 생각에만 그칠수 있었던 걸 끄집어 낸 셈이다. 글로 표현되지 않은 아이디어의 역사는 없다.
글쓰기를 통해 내가 무엇을 몰랐고 무엇을 잘 알고 있었는지가 판가름된다.
- 글쓰기는 그 자체가 피드백 루프이며, 자기 객관화를 돕는다
- 복잡한 사고에는 항상 글쓰기가 요구된다. 글로 생각을 정제해야 한다
- 글로 표현되지 않은 아이디어의 역사는 없다. 머릿속 생각을 끄집어내야 한다
b. 영구메모 간 연결을 통한 지식 네트워크 형성
무언가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과 유의미한 방식으로 잘 연결지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 기억을 불러일으킬만한 적절한 신호를 발생시키기만 하면 언제든지 끄집어낼 수 있는 지식이 된다.
이렇게 기존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연결시켜가면서 지식 네트워크의 규모를 늘려가면, 하나의 지식에도 유의미한 맥락들이 많이 생김을 뜻한다. A1 지식을 떠올렸을 때 자연스레 A2, A3 지식이 연상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제텔카스텐은 새로운 메모를 작성할 때 기존 메모와의 관련성을 찾아보고 연결짓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선순환 구조를 자연스레 밟을 수 있다.
학습
기억
2. 제텔카스텐이 제시하는 상향식 글쓰기는 글쓰는 과정에서의 많은 피로도를 줄여준다
니클라스 루만의 제텔카스텐을 연구한 숀케 아렌스는 기존의 하향식 글쓰기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비어있는 화면 혹은 빈 종이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여 완성짓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글쓰기 강좌에서 하향식 글쓰기를 설명하고 있는 건 메모의 힘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 연구를 선행할 것이 아니라, 연구된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써낼 줄 알아야 한다. 이 방식을 택하면 글쓰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많은 고민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메모 상자에서 메모 뭉치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글감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많은 작문 수업에서 하향식 글쓰기를 소개하고 있는 건 메모의 힘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 제텔카스텐을 활용하면 글감에 대한 고민이 불필요하다. 그저 클러스터가 형성된 메모 뭉치를 살펴보면 된다.
3. 제텔카스텐의 지식 네트워크는 창의성의 발현을 돕는다
창의성이란 서로 다른 지식간의 융합으로 인해 발생한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지식들이 연결되어서는 새롭게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제텔카스텐은 창의성이 발현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다. 비선형 구조로 잘 구성된 제텔카스텐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지식들이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특정 지식이 다른 지식들과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를 따라가다보면 손쉽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MOC와 graph view를 활용하면 더 쉽게 연결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텔카스텐을 꾸준히 활용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제텔카스텐을 활용해서 작성해 본 첫 번째 글이다. 아쉽게도 글 쓰는 프로세스가 기대한 만큼 원활하게 동작하지는 않았다. 인풋을 영구 메모로 가공하여 지식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은 만족스러웠고, 규모가 커져도 어느정도 관리가 가능할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제텔카스텐 클러스터에서 선별한 영구 메모들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던 건 제텔카스텐을 활용하기 전과 같았다.
고무적인 건,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기에 노하우가 쌓이면서 점차 개선될 것이라는 점과, 제텔카스텐의 동작 원리를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들이 피드백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제텔카스텐을 모른채 디지털 노트 앱을 활용했던 때를 떠올려보면, 이미 벌써 많은 진전을 이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 달 뒤에도 차곡차곡 메모를 쌓고 있을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