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huck

2022.11 독서

·17 min to read

생계형 개발자, SI에서 살아남기

생계형 개발자, SI에서 살아남기

피, 땀, 픽셀

피, 땀, 픽셀

게임 칼럼 기자가 직접 취재한 10가지 트리플 A 게임의 제작 과정 비화가 담긴 책이다. 주로 게임 개발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를 보여준다. 저자가 특별히 게임 개발 과정의 고단한 부분만을 편집하고 재단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게임이든 완성한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한 개발자의 말처럼, 게임 개발은 원래 무지막지하다.

개발자들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성공이 불분명한 프로젝트에 운명을 맡긴다. 그러면서도 매년 어김없이 발전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뒤쳐지지 않는 게임을 만들어내야 한다. 우상향하는 게이머들의 눈높이에 부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처음 써보는 더 파워풀한 게임제작 툴도 능숙히 다뤄내야 한다. 1) 이건 마치 영화를 찍을 때마다 카메라를 새로 개발해서 찍는 격이다.

기획안은 시도때도 없이 바뀐다.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을지는 직접 해보기 전까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련한 게임 디자이너의 아이디어 일지라도 머릿 속에서의 구상과 실제 재현물의 느낌은 천지차이다. 세상에 같은 게임은 없고, 비슷한 방식으로 제작되는 게임은 더욱 없다. 설상가상으로 이전 게임의 성공 공식이 이번에도 통용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 모두가 수 개월 혹은 몇 년에 걸친 작업물을 정당하게 백지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불가항력의 근거가 되어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게임 개발은 그렇게 녹록치가 않다.

이제 새로운 게임 제작 툴에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몇 번 갈아엎고 나니깐 게임의 방향도 자리잡혔고, 투자사와 배급사의 엿 같은 요구사항도 기를 쓰며 반영해주었다. 중간 중간에 E3와 같은 게임쇼에 출품할 프로토타입 제작도 잊지 않았다. 기존 프로젝트에서 재활용할 수 없는 일회성 시연용 프로토타입이여서 또 시간을 날린 것 같지만 적어도 홍보에는 도움이 됐다. 그랬더니 출시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치명적인 버그가 산더민데. 이대로 출시하면 망할 것 같아서 투자사를 간신히 설득해 일정을 지연시켰다. 지연된 일정 만큼 크런치2) 기간이 늘어났다. 평일 저녁과 주말까지 반납한 게 벌써 몇 달 짼데... (눈에 먼지가..)

<a name="footnote_1">1)</a>: 게임 업계에서 흔히 드는 비유라고 한다.

<a name="footnote_1">2)</a>: 이를 갈 때 나는 '으드득' 소리를 뜻하는 영단어 'crunch'에서 유래. 밤을 새며 일하는 개발자들의 심정을 잘 표현하는 이 단어는 기한에 맞추어 강도 높은 근무 체계에 들어가는 기간을 일컫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매년 게임 개발자 회의(GDC)가 열리는 기간에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보자. 그러면 카페인에 찌들어 코드를 짜며 밤을 지새운 무용담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퀭한 디자이너 무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참호에서 생긴 일' 등 전쟁 용어를 동원해가며, 바깥세상에서는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런 게임 개발자에게 다가가서 하루 종일 비디오게임을 하면서 사는 소감을 물어보면, 이들의 짜증을 확실하게 돋울 수 있다.

(...) 그리고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지만,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모든 사람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 속에 개인의 삶과 가족과의 시간을 희생하며 스스로를 갈아 넣어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도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직업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이들은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다른 어느 매체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선사하는 오락물을 개발하며,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동료들과 협동해, 장차 수백만 명이 즐길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창조한다.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서 모든 난관과 부담감을 이겨내며, 혹여 중간 결과물이 형편없더라도 절망을 딛고 일어날 때 비디오게임 개발이 소중한 일이라는 믿음이 굳건해지는 것이다.

새로 만든 스텔스 메커니즘을 실제로 적용할지 말지, 몇 주에 걸쳐 플레이 시험과 수정을 반복하지도 않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몇 주 동안 최적화를 해보지도 않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환경이 적절한 프레임 레이트로 작동하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게임 제작 후반에 없애야 할 버그가 몇 개나 있는지, 모득 작업을 끝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너티 독은 다른 모든 게임 스튜디오와 마찬가지로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럴듯, 처음 예상했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크런치 모드가 답이다.

사람이 싫다

사람이싫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간혹 다른 직업군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에세이를 찾아 읽는다. 많고 많은 직업군 중에서도 또 법조인의 책을 골라 읽은 까닭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문유석의 <판사유감>을 읽고 '법조인만큼 별의별 인간군상을 다 만나볼 수 있는 직업은 없겠다'고 생각헀던 게 유효했던 것 같다. 대체로 법조인들은 재미있는 썰 풀 거리 많다. 또 생각난 것은, 현실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견지한 이들의 인생 이야기라는 점이다. 나는 아직도 종종 허황된 생각을 하고 이상을 좇는다.

이로써 판사, 검사, 변호사가 쓴 에세이를 한 번씩 읽어 본 셈이다. 세 직업군의 역할이 다른 만큼, 조금씩 다른 관점으로 법과 재판을 바라보는 게 재밌었다.

소송에서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불리한 내용을 감추고 유리한 내용만을 강조해야 한다. 증거를 조작하거나 허위 사실을 주장하지만 않으면 된다. 탈세는 범죄이지만 절세는 영리함이다. 공무원인 검사는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 무죄의 증거를 숨기고 모른 척하면 안 된다. 법률에 명시된 법적 의무다. 하지만 변호사는 이렇게 규칙의 틀 안에서 빈틈을 파고 들어가도 된다. 같은 법조인이면서도 판검사가 지는 무거운 의무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변호사는 돈을 준 의뢰인에게 이익을 안겨주기만 하면 된다. 변호사는 용병이다. 고용된 총잡이다.

Everybody lies. 닥터 하우스가 떠올랐다.

(...) 변호사는 학자가 아니라 기업 경영인이다. 1인 사업체든 법무법인 대표변호사든 마찬가지이다. 도심 대로변 번듯한 사무실에 고용 변호사 여러 명 두고 일하는 변호사와 도저히 변호사가 있을 것 같지 않은 허름한 곳에 달랑 비서 한 명 둔 변호사. 그리고 비서조차 없는 나홀로 변호사까지. 얼핏 보면 다르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이들 모두 '사업'을 하고 있다.

변호사 이야기를 시작하고선 지금까지 계속 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아할 수도 있겠다. "이건 내가 생각한 변호사가 아닌데?" 또는 "변호사가 도대체 왜? 그럴 리 없잖아."라는 생각들. 대단히 미안하지만 완벽한 착각이다. 돈 계산, 돈 걱정, 돈 욕심을 떠난 변호사 생활은 상상할 수 없다. 공무원이 되거나 기업체에 들어간 경우를 제외하면 변호사도 경영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걸 의심하게 된다.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 우리 편부터 먼저 의심해야 한다. 의뢰인은 나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부끄러운 일을 모두 털어놓진 않는다. 일부분이라도 감춘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성과를 낼 수 잇다.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도 의심해야 한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다. 사람이 싫어진다.

법정은 공인된 거짓말 경연장이다. 거짓말해도 괜찮다. 걸리지만 않으면 이긴다. 걸려도 다른 거짓말을 이어가면 된다. 양쪽 주장에는 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그 배합 비율이 관건일 뿐이다. 그래서 민사 소송은 종종 51:49의 싸움이 된다. 주장에 일리는 있지만 아쉽게 49 수준에 그치면 전부 패소하지만 그 한고비를 넘기고 51이 되는 순간 전부 승소로 바뀐다. 위증죄가 무섭지 않느냐고? 전혀. 위증죄는 선서한 증인에게만 적용된다. 소송 당사자는 증인이 아니다. 거짓말하다 걸려도 위증죄 부담은 없다. 잠시 망신당하고 끝난다.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 거짓말 대회의 훌륭한 참여자다. 의뢰인의 거짓말을 포장하고 가린다. 진실하게 보이도록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다. 가끔 의뢰인에게 먼저 거짓말을 제안하는 정신 나간 변호사도 있다. 무엇보다 변호사는 내 의뢰인이 거짓말하듯 상대방 역시 그렇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상대방의 거짓말이 최대한 두드러지게 노력한다. 양쪽 모두 마찬가지다. 다 돈 받고 하는 일이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재판 현실이다. 직업적 양심과 금전적 만족을 동시에 얻으려면 사건을 가려 받아야 한다. 이것저것 다 받으면 심각한 자기 부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나저러나 변호사는 당사자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주인님 대신 천하제일 '거짓말' 대회에 출전한 '용병'이다. 규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의뢰인을 위해 싸워 이기는 게 변호사의 임무다. 들키지 않을 자신 있으면 눈도 찌르고 귀도 깨물고 로 블로Low Blow도 날려야 한다. 변호사는 거짓말 대회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어찌 사람이 싫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알고 보면 변호사는 엄청나게 수동적인 사람들이다. 누굴 만나고 어떤 사건을 맡느냐에 따라 수행하는 업무가 정해진다. 어떤 것을 얼마나 성취할지도 그에 따라 결정된다. 여기에는 우연과 운이 크게 작용한다. 찾아 나서서 인연을 만들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운이 좋아야 한다.

최소한의 선의

최소한의 선의

믿고 읽는 문유석 판사의 책이다. 헌법이라는 따분한 주제를 가지고도 쉽고 재밌게 잘 풀어쓴 책이다. 저자는 코로나 팬데믹이 시국인 2020년, 공포심이 법의 경계를 허무는 장면을 목격하고 법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저자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현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법이 왜 그렇게 행해지는지 속시원하고 반박하기 힘든 대답을 들려준다.

어설픈 법 지식으로 선동하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팩트 폭력을 행하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의지로 회사와 계약을 한 노동자가 노조에 속해 파업하는 건 계약자유의 원칙을 침해하는 행동이다'라는 주장에 계약자유의 원칙은 민사법에 해당하고 그 위에 상위법인 헌법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 3권을 보장하기 때문에 노조 파업은 정당한 행위라고 대답해준다.

이렇게나 서로 다른 인간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이것만큼은 꼭 지키자고 약속한 최소한의 선의, 그것이 법 아닐까. '법'이나 '도덕'은 차갑고 멀게 느껴지지만 '선의'는 따스하고 가깝게 느껴진다.

헌법의 최우선 가치, 존엄성

헌법의 최우선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 존엄성은 성경에서 출발했다. 신이 자신의 피조물 중 인간에게 유일하게도 이성,지성 등을 부여했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다고. 이 사상을 철학적으로 총망라한게 바로 칸트다. 인간은 누구나 독자적으로 양심에 따른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존재이므로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수단으로서 사용되면 안 된다. 칸트의 철학은 현대 헌법이 말하는 존엄성의 근간을 이루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내린 판결 중 이 존엄성에 대해 부연해줄 판례가 있다. 뉴욕에서의 911 테러 이후, 2005년 독일 의회는 테러범에 의해 납치된 항공기가 다수의 생명(빌딩)을 위협할 경우 항공기를 격추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했다. 공리주의식 사고다. 이에 대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아주 멋지다. '국가가 납치된 승객을 타인의 보호를 위한 국가적 조치의 단순한 객체로 만드는 것은 인간 존엄성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위헌으로 판단했다. 이 판결은 '인간이 국가행위의 단순한 객체가 된다면 인간 존엄성을 침해한다'는 칸트의 철학을 따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최고의 헌법적 가치이자 헌법과 국가의 존재 이유다.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권리나 법 원칙과 충동할 때 우선순위를 비교해서 제한하거나 후순위로 돌릴 수 없다.

자유와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탱하는 기둥이고,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역시 자유권적 기본권, 평등권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원래 칼같이 정밀한 논리로 논증하기 어려운 주제라는 점이요. 먼저 느끼셔야 됩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라며 불끈 치밀어오르는 감정을요.

사형제도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가?

칸트는 오히려 인간이 존엄하기 떄문에 사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율적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선택을 했다면 그 행위에 걸맞는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그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방법이라는 논리다.

반면 사형제도를 반대한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는 범죄에 대한 억제력 측면에서 사형제의 효과가 일시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라는 이유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차라리 사형보다는 감옥에 수용되어 자유가 박탈당한 범죄자의 모습을 오래 보게 하는 게 범죄 억제 측면에선 좋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국민을 죽이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

사형제 폐지 여부는 딱 떨어지는 논리로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문제, 또는 위헌/합헌으로 갈리는 문제라기보다 국민의 선택의 문제(이것을 입법정책적인 문제라고 한다)가 아닐까.

우선은 원칙의 문제다. 국가에 합법적으로 국민을 살해할 권한이 부여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다를 수밖에 없다. 코로나처럼 예상치 못헀던 보건 위기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기후 변화와 고령화 같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변화도 많다. 응보라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형을 집행하듯이 공공복리를 목적으로 일부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때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우리는 고민해봐야 한다.

형벌 권한을 남용하는 독재자는 언제든, 어디서든 출현할 수 있다. 이때 오랫동안 사형이 금지되어온 나라와 시행되어온 나라가 맞이하는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점들을 모두 감안해도 응보를 위해 사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과 망성임을 느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해본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평소 포털 기사 댓글에서 보게 되는 국민 여론과 직접 피고인을 눈앞에서 보며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의 양형의견은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의 배심원들은 판사들보다 낮은 양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응보 감정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국가에 의한 살인인 사형에 대해 느껴지는 불편함과 두려움의 감정 역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자유와 법치주의

자유의 역사는 법치주의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법치주의를 빼놓고 말 할 수가 없다.

동양에서는 법치주의 하면 진시황 시대의 법가사상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엄한 형벌과 형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서양의 법치주의는 법가사상과 완전히 정반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발전했다. 영국의 전제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마그나 카르타 등)에서 왕의 변덕과 횡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면 왕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관철한 이데올로기다.

법치주의는 법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누구든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지 말고 항상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답답하고 지루한 법치주의가 사망한 곳에는 속시원하고 화끈한 파시즘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파시즘이 득세한 곳에 개인의 자유가 설 자리는 없다. 법치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헌법은 개인에게 다양한 자유를 보장한다. 인간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유별나고, 비루하고, 불온할 자유가 있다. 털복숭이 아저씨가 집에서 비키니를 입고 있어도, 국가 전복의 계획을 마음속으로 세워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골방에서 혼자 마약을 투약하는 행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닌가? 도박하다 파산에 이르러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진 않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 하지만 국가는 이를 제지한다.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국가는 일정한 경우 나를 파괴할 권리,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2005년 개인이 대마를 주고받고 흡연할 자유가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대마 흡연의 자유는 있지만, 사회질서 유지 및 공공복리를 위해 법률로써 이를 제한하는 게 더 우선시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저자는 위 판결에 수긍하면서도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헌법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예외'적으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즉, 자유가 원칙이고 제한이 예외다. 자유는 최대한, 그 제한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이 제한이 당연시되어 자유가 축소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사생활의 성채 안에서 개인은 유별날 자유가 있다.

생각에는 금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은 변화의 씨앗이다.

신형철 평론가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들인 것이다.

이 모든 논리가 다 맞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유가 원칙이고, 제한이 예외다. 자유를 제한하려는 사회 쪽이 개별적인 사안마다 제한의 필요성과 적절성을 입증해야 하고, 개인은 너무 쉽게 그 제한을 받아들이고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나를 파괴하는 행위'조차 당연한 듯 쉽게 규제된다면, 다른 행위들은 더더욱 쉽게 규제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란 과장될 수 있고, 악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악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피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과 그 정도는 필요 적절하고, 최소한이어야 한다.

소비자 불매운동은 마냥 정의로운가

전통적인 시각에서 소비자는 약자였고 기업이 강자였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익명성이 보장된 수십만명이 순식간에 결집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지금도 소비자는 마냥 약자인가? 대왕 카스테라 사건은 정의로웠는가? 이제는 구매력을 무기로,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소비자가 시장을 주무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표현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고, 소비자들의 집단적 의사표현에는 더 많은 책임이 부과되어야 한다. 헌법에서도 소비자 불매운동은 '객관적으로 진실한 사실을 기초로 행해졌는가'를 비롯한 네 가지 조건을 만족한 경우에만 민사책임/형사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시민들 스스로의 집단적 표현의 자유가 동료 시민의 다른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는 사례가 예술의 자유, 창작의 자유 쪽에서도 늘어나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자유를 재단하려는 시도는 역사를 통해 여러 번 이루어졌다.

법은 범죄자에게 관대하지 않다

어지간한 이슈에는 여론이 분열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 하지만 '범죄자에게 관대한 판결'이 부각되는 이슈에서는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도대체 왜 법은 피해자 편을 들지 않고 가해자 편을 드냐고.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법이 인간에게 관대하게 만들어지다보니 범죄자들이 반사적 이익을 누리게 된 것이라고.

전직 법조인인 죄로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도대체 왜 법은 범죄자들에게 관대한 것일까. '도대체'가 핵심이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불만과 분노의 표현이다. 온갖 이슈마다 극렬하게 여론이 분열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범죄자에게 관대한 판결'에 대한 분노만큼은 압도적 다수의 공감을 받곤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 처럼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소년범죄에 대한 분노를 다룬 소설은 쏟아지는 공감을 얻는다. 독일 강력범죄 수사관이 쓴 범죄 수사 논픽션을 읽은 적이 있는데, 힘들여 범인을 잡아도 솜방망이 처벌로 끝내곤 하는 독일 판검사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미국은 다르지 않으냐고?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형량이 높은 나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수감시설 부족과 교정 예싼 부족에 늘 시달리는데다 가석방제도가 발달되어 있어 선고된 무시무시한 형량을 다 복역하지 않고 일찍 가석방되는 경우도 많으니 겉만 보고 판단할 일은 아니다.

그게 너무나 불합리하다고? 범죄자는 인간이 아니다, 범죄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그 기준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경범죄도 전부? 중범죄부터라면 어디서부터 인간이 아닌 것으로 간주해야 할까? 그리고 누가 인간이고 누가 인간이 아닌지에 대한 '인간 여부 결정'을 국가에 맡겨도 괜찮은가?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까.

어차피 사형시키거나 종신형에 처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사회에 다시 나올 수밖에 없다.

공리주의 관점에서 보면 형벌은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 수준이면 족하다. 그 수준을 넘는 엄벌은 사회적 비용을 낳는다. 정의는 공짜가 아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교도소를 증설하고 교정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 정의를 외치는 시민들도 막상 '정의세'를 내라고 하면 반발하거나, 자기 지역에 교도소가 신설되는 것은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요약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헌법질서에 내재한 '인본주의'와 '공리주의'는 형벌에 대해 '필요 최소한'의 관점으로 접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