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huck

2022.01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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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까지 가자

달까지 가자

일확천금을 꿈꿔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서점 베스트셀러 매대를 보면 '돈'에 관련된 서적들이 그 어느때보다 눈에 띈다. 메타버스같은 비즈니스 트렌드 서적의 인기 또한 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돈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내 생각은 심증에만 그치지 않는다. Yes24의 분석에 따르면 재테크/투자 분야의 서적 판매가 작년 대비 49.3%나 증가했다고 한다. 이제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코인, 주식 얘기하는 것에 아무런 위화감이 들질 않는다.

이 책의 흙수저 직장인 삼총사는 코인을 통해 일확천금의 기회를 맛본다. 3인방 중 돈에 가장 빠삭했던 '은상'은 33억 원을, '지송'이와 '다해'는 3억 원 정도의 차익을 남기고 이야기는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책을 다 읽고 내 머릿속을 떠도는 건 '소년등과일불행'이라는 말과 '일확천금이 과연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가'라는 주제였다.

'은상'이 코인으로 수십억을 벌고, 강남에 건물을 사고, 마세라티를 타고 다닌다는 소문이 회사에 돌자 다른 부서의 한 팀장이 이렇게 말한다. 중국 송나라 시대의 학자가 '소년등과일불행'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어린 나이에 급제해서 출세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해 교만해지는 까닭에 인생의 몇 가지 불행 중에서도 제일로다가 불행한 일이라고. '은상'이 벼락부자가 된 건 과거의 소년등과나 마찬가지여서, 자기는 '은상'이 하나도 안 부럽다고.

위와 같은 발언을 한 팀장은 무능과 꼰대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자여서 독자들에게 저 격언이 와닿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궁금했다. 내 수중에 33억원이 떨어졌을 때 마주할 불행은 정말 단 하나도 없을까? 행복만 가득할까. 작중 '다해'가 7성 호텔을 접하고 인피니티 풀을 경험하면서 내비쳤던, 더 좋은걸 경험할수록 욕망이 충족되는 기준치가 계속해서 올라간다는 그 굴레에 빠져드는 건 아닐까?

불행이 없지는 않겠지만 행복이 이를 압도적으로 상회하므로 별 문제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3억 정도의 자금이라면 닥쳐올 불행이 1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해'가 너무 부러웠다. 다해는 월급생활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그러고는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고 월세에서 전세로 이사갈 자금이 되어주는 3억이 '독의 구멍을 메워주는 떡두꺼비' 같다고 말한다. 내게도 떡두꺼비가 나타나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타나지 않더라도(않겠지만) 주어진 기회 안에서 잘 해봐야지.

나는 욕망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두고 볼 문제다. 이번 겨울을 맞이하기 전, 월급의 대부분을 의류 구매에 쏟아부으면서 했던 생각이 '두고두고 입을 옷이니깐'이었다. 이사를 오고 비싼 가구를 들이며 했던 생각도 '10년은 쓰겠지'였다. 두고두고 입고 계속해서 쓰다가 더 좋은 것들을 발견했을 때 내가 지금의 것들에 만족할 수 있을지.

기가 막혔다. 3년 11개월 전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냥 "네네" 대답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네네"만 반복하며 살다가는 뜨거운 증기를 가득 머금은 밀폐용기처럼 위험해진다는 것을, 그래서 열기가 비집고 나갈 숨구멍 같은 게 필요하다는 것을, 지난 3년 11개월간의 "네네" 끝에 스스로 깨우쳤다.

사실 스낵은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 아니었다. 회사의 대표 상품을 만드는 초콜릿팀과 빙과팀에 밀려 스낵팀은 몇년째 신제품도 내지 않고 유지보수만 하고 있는 가장 작은 팀이었고 회사에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연히 팀장인 고대영 부장에 대해서도 기대가 없었다.

"너도 빨리 들어와. 솔직히 우리한텐 이제..... 이것밖에 없어."

"난 이게 우리 같은 애들한테 아주 잠깐 우연히 열린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해."

매월 독촉하듯 쏟아지던 문자가 그치고, 거듭되던 일, 되풀이되던 부담이 일시에 날아가버리자 어쩐지 치트 키를 썼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허탈했다거나 죄책감이 느껴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이런 치트 키를 이제라도 누군가 알려줘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0이라는 숫자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이 동그라미가 마치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포털의 입구처럼 여겨졌다. 굳게 잠겨 있던 출입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로소 활짝 열리는 기분, 그 밖으로 발을 가볍게 내디디는 느낌이 들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몸이 가벼워진 느낌마저 들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기분으로, 이렇게 홀가분한 발걸음이 기본인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삶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너무나 희미하고, 아득했다.

인피니티는 무한하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결코 가닿을 수 없다고 여겼던 아득히 먼 세계. 그런 곳에 운 좋게 발을 살짝 담갔는데 이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욕심에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하고 나면 이제는 저걸 하고 싶고, 저걸 하면 그다음 걸 하고 싶어졌다. 한계가 없는 내 욕망이, 그 마음들이 왜인지 창피했다.

얼마간 그렇게 관찰하다보니 눈치챌 수 있었다. 아침에 자연스럽게 눈을 뜰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빛 덕분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아침 햇살을 경험한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엄마와 함께 살던 집들을 포함해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방들은 아침에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정북향이거나 북서향이었고, 지금 살고 있는 방은 남향이긴 하지만 앞 건물이 창문 전면을 가로막고 있어서 아주 미묘하고 특정한 각도에서만 해를 볼 수 있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라는 말. 자연스럽고 흔한 말이지만 그런 자연스러움은 결코 쉽게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2룸에 살게 되자, 침대에 누워서는 현관과 부엌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제는 먹고 난 음식 냄새도 침대 위로 올라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또 창문 두개가 마주 보고 있어서 환기가 잘되는 곳에 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그런데, 고작 그런 게 욕심일까? 잘 때는 음식 냄새를 맡고 싶지 않은 마음을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도 이사는 빨리 가고 싶다. 이번에 전셋집을 구하면 비로소 월세와 이자를 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다. 6년 차. 이제야 버는 돈이 조금씩이나마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동안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내 떡두꺼비 같은 3억 2천이 그걸 막아줬다.

나는 주니어 개발자

나는 주니어 개발자

이 책의 공동 저자 다섯 명은 각종 매체에서 소개되며 필드에서 두각을 드러낸 개발자는 결코 아니고, 하다못해 네카라쿠배 같은 대기업에 속한 촉망받는 개발자도 아니다. 평범함을 자처한 개발자들이다. 그래서 이 책엔 대다수의 평범한 개발자들이 겪어봤을, 혹은 앞으로 겪게될 애환이나 고충같은 게 잘 스며있다. 이런 부분에 공감하며 재밌게 읽었다.

취업에 난항을 겪는 게 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에 위안이 되기도 하고, 이들만큼 절실하게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취직을 바라고 있는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다.

책의 구성이 좋다. 취업에 오랫동안 매진했던 개발자는 그 때의 경험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비전공자 출신의 대학원 진학자는 남들보다 뒤처진 만큼 치열하고 끈기있게 공부했던 경험을 들려준다. 백엔드 개발자는 회사에서의 실무 경험을 통해 주니어 개발자를 위한 꿀팁들을 제공한다. 닥치는대로 면접을 보며 좋은 기회를 쟁취해낸 개발자의 경험은 도전하지 않는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계속되는 좌절의 연속이면서, 나에 대한 많은 실망을 되삼키는 과정 같다. 그 과정에서 실패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가끔 너무나 큰 실패는 내 마음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때마다 울면서 주섬주섬 내 마음의 조각들을 이어붙이곤 했다. 깨지면 다시 붙이고 또 깨지면 다시 붙이고. 어차피 안 된다고 안 할 것은 아니었으니까, 큰 실패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한 최선은 실패할 것을 알고도 계속해서 하는 것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지난 날에 내가 이어 붙였던 실패의 흔적들은 내 마음 한 켠에 작은 스테인드 글라스가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결과보다 과정이라고 말은 하지만, 어떤 때에는 결과도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어떤 실패를 겪었든 어떤 아픔을 겪었든, 그렇게 얻어낸 결과에 스스로 만족한다면 그 아픔과 실패들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주니어 개발자들은 회사에세 이미 만들어져 있는 편한 것(?)들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한때는 좋은 회사에 다니는 개발자, 실력이 뛰어난 개발자들을 보면서 현재 나의 위치와 비교했던 적도 많았다. 심지어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도 시니어 개발자들이나 다른 개발자들을 보면 너무 잘해서 위축된 적도 많았다. 이때마다 내 멘탈을 잡아줬던 것은 '헬스'였다... 헬스라는 취미가 나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 주고 모자란 개발 실력을 커버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개발도 어느 정도 하지만 운동도 좀 해'하는 마인드를 가지니, 더는 남들과 비교를 하지 않게 된다.

알고리즘은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지만, 노력한다면 누구나 익숙해질 수 있는 분야이다.

메타버스

메타버스

세 달 정도를 질질 끌며 힘겹게 읽은 책이다. 직전에 읽은 정세랑 작가의 책을 읽을 때와 비교해 봤을 때 형편없는 독서 경험이었다.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고 페이지도 넘어가질 않았다. 점심먹고 책 읽는 그 잠깐의 시간의 설레임 같은 게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본인에게 잘 맞는 책을 고르는게 이렇게나 중요하다.

도입부 저자 소개란에서 게이미피케이션을 연구하고 있다는 이력을 발견하곤 나와 같은 유파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책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으나, 충족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게이미피케이션을 다룬 저자의 다른 책에는 아직 기대를 걸고 있다)

책의 내용 대부분이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메타버스가 적용된 사례 소개의 반복 또 반복이다. 해당 사례에 덧붙여지는 작가의 생각은 고작 한 두 줄에 그친다. 그렇기에 통찰력이 돋보이는 현상분석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사실 전문가의 해석이 덧붙여지지 않은 단순한 정보 취득에는 위키백과가 더 용이한데 말이다. 사례 모음집이라면, (더욱이 그 주제가 메타버스라면) 시청각 자료가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유튜브로 보는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책에 소개된 메타버스의 정의는 기억해 둘 만하다.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이라는 기술 연구 단체에서는 메타버스를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세계, 라이프로깅(lifelogging) 세계, 거울 세계(mirror worlds), 가상 세계(virtual reality) 네 가지로 분류한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 포스트를 올리거나, Vlog를 찍어서 내 삶의 경험과 정보를 기록한다면 라이프로깅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또한 원격수업, 원격회의나 배달의 민족 앱으로 음식을 주문하거나,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해 봤다면 그건 거울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거울 세계는 실제 세계의 모습, 구조, 정보 등을 가져가서 복사하듯이 만들어 낸 메타버스를 말한다.

공간의 미래

공간의 미래

최근 이사갈 집을 알아보면서 형성된 공간과 가구에 대한 관심이 이 책으로 이어졌다. 책을 대여하기 전 '청년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챕터를 읽었는데, 마침 내가 안고 있던 고민에 꼭 들어맞는 내용이어서 흥분된 상태로 재밌게 읽다가 대여했던 게 기억난다.

이 책은 아파트(주거공간), 종교, 학교, 직장, 도시 등의 공간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설명하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도래에 따라 기존의 공간, 건물 양식이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할지를 연구한 책이다.

유현준 교수의 글은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술술 읽히는 편이다. 유현준 교수만의 독특하고 창의력 넘치는 시각은 글의 재미를 더한다.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삽화는 너무도 직관적이어서 저자의 생각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것을 돕는다.

소셜믹스와 시공간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이 임대/분양의 형태로 하나의 아파트 단지에 어울려 사는 것을 소셜믹스라한다. 유현준 교수는 작금의 소셜믹스가 아파트 소유자들이 임차인들을 배척하는, 저소득층과 고소득층간 갈등의 불쏘시개로 작용되고 있는 사태를 안타까워 하면서 소셜믹스에 '익명성'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방의 배경이 어떤지 모르는 익명성의 상태에서는 좀 더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기대할 수 있으리란 이유에서다.

'그냥 따로따로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게 사전에 갈등을 차단하는 방법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유현준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에겐 2002년 월드컵 시청 앞 광장에서와 같은 소득분위를 막론한 공통의 추억이 필요하다고. 돈 많은 사람은 5,000원을 내고 스타벅스에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1,500원을 내고 빽다방엘 가는 이 도시엔 빈자와 부자가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고. 모든 시민의 공통된 추억이야말로 계층 간 갈등을 완화하고, 서로를 융합하는 열쇠라고. 그리고 공간을 잘 디자인하기만 하면 위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일정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셜믹스에 익명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청년의 집은 어디에 있는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많아지고 사회가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해 주지 못할 때 탄생하는 캐릭터가 ‘홍길동’이다. 탐관오리를 징계하고 곳간을 헐어서 가난한 국민에게 나누어 주는 캐릭터가 지지를 받는다. 또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무원 수를 늘리고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는 정치가들이 인기를 얻는다. 간과해선 안 되는 점은 이 과정에서 나눠 주는 자가 권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치가는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의 인기와 권력을 만든다. 홍길동 같은 정치가가 많다는 것은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고 계층 간 이동 사다리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 등장한 아파트는 사회 계층 간 이동 사다리 역할을 했다. 아파트를 사는 것은 지주가 되고 중산층이 되는 길이었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그런 사다리가 없으니 비트 코인에 몰리고 동학 개미가 되고 주식 양도세에 분노하는 것이다.

월세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월세로 사는 것은 내 부동산 자산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돈은 부동산을 소유한 누군가의 자산으로 축적된다.

매년 경제 성장을 목표로 움직여서 인플레이션이 되는 자본주의 경제에선 부동산을 소유하지 못하면 계속 뒤처지게 된다. 반대로 부동산 자산을 소유하면 경제 성장의 열매를 나눠 가질 수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주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부동산과 동산 두 가지 자본의 날개 중 한 개의 날개로만 날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사람, 장소, 환대

사람,장소,환대

재작년 이맘때 쯤 겨울서점으로부터 강매당해 전자책으로 구매해서 읽었지만, 한낱 휴대폰 어플리케이션 속에 갇혀 있어선 안 될 책이라고 생각해서 이번에 종이책으로 다시 구매해서 읽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후기들을 살펴보면 이 책을 '인생 책'으로 꼽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데, 내게도 그에 필적할만큼 재밌게 읽은 책이다. 단 하나의 비문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유려한 문장력으로 좋은 내용들을 꾹꾹 눌러 담아 쓴 것만 같은 책이다.

아래에 소개할 사람/장소/환대라는 커다란 줄기는 당연히 흥미롭고, 차별/배제/낙인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서 근대 이전에 만연했던 모욕이 신자유주의에 이르러서 굴욕의 형태로 자행되고 있다는 점, 경제적인 소외가 어찌하여 사회적인 소외로 이어지는지를 설명한 잔줄기 같은 내용들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또한 가부장제와 음양론에 의거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차별을 은폐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식으로 작용했다는 부분과 사람을 정량화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부분도 인상깊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1824년에 출판된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를 소개하며 시작하는 이 책의 프롤로그는 압권이다. 주인공 페터 슐레밀이 파티에서 만난 회색 옷의 사내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금을 무한으로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와 교환 함으로써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림자를 잃어버린 슐레밀은 더 이상 대낮의 길거리를 활보할 수 없게 된다. ('아니 당신은 그림자를 어디다 두고 오셨소?' '하느님 맙소사! 저 불쌍한 인간에겐 그림자가 없네!') 슐레밀은 밤과 그늘의 도움을 빌려서만 남들과 교제할 수 있는 고독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절망에 빠진 슐레밀에게 회색 옷을 입은 악마가 다시 나타나 그림자를 돌려줄 테니 죽은 뒤의 영혼을 요구하지만 슐레밀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설상가상으로 행운의 자루마저 잃어버려 그림자 뿐만이 아니라 돈 마저도 없어진 슐레밀은 우연히 한 걸음에 칠십 리를 가는 전설의 장화를 얻게 된다. 지구 여기저기를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슐레밀은 자연을 연구하는 새 삶을 시작한다. 슐레밀은 죽기 전에 자신의 혁혁한 연구 성과가 기록된 책을 오랜 벗 샤미소에게 건네주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벗이여, 만약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이라면 부디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그림자를 상실한 슐레밀은 어디서나 남들의 시선을 끌기에, 사람의 수행 또는 사람 연기에 있어 애로사항을 겪는다.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받기 위해선 결함을 드러내지 않게끔 밤에만 교류하는 식의 비가시화 전략을 펼칠 수 밖에 없다. '그림자 상실'이라는 결함을 성공적으로 숨기는 한에서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숨기지 못한 대낮의 슐레밀은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사람자격'이란 이처럼 조건부적인 것이다.

이 책 <사람, 장소, 환대>는 그림자의 문제를 다룬다. 즉,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원작자는 '칠십 리 장화'라는 도구를 동원해서 사람이 그림자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김현경 작가의 생각은 다르다. 그리고 사람이 장소, 환대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를 살핀다. 사람은 장소 의존적이며 타인의 인정(환대)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

현대 사회는 우리가 잘살건 못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모두 사람으로서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사람행세를 하고 사람대접을 받는 데 물질적인 조건들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이란?

인간과 사람을 분리해서 봐야한다. 인간을 자연적 사실의 문제로 볼 때,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다. 지금은 이 구분이 모호해졌지만, 과거에는 갓 태어난 신생아가 각각의 문화에 걸맞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사람이 되어 사회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인간이지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가 그렇다. 이들의 예는 사람의 개념에 내포된 인정의 차원을 드러낸다. 뱃속의 태아는 인간이지만 아직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로마법은 노예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라고 규정한다. 노예는 노예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현상하지 않는다. 현대전에서 병사는 사람이 아닌 물건이다. 이는 전시에 적군을 죽이는 것이 '인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사형은 사형수가 사람자격을 박탈당하고 물건의 지위로 떨어졌기 때문에 묵인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출생과 사회적 환대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었고, (백일잔치 등) 그 기간 동안 아기는 아직 사람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람과 장소

사람이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고 보았을 때, 그 사람이 어느 장소에 있는가는 중요하다. 노예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했기에 노예인 것이다. 노예는 그가 원래 있었던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실종자다. 실종자로서 법적 인격을 잃은 노예는 그가 도착한 사회에서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해서 물건 취급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장소의존적이다. 사람이었던 노예가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자 사람이 아니게 되었듯이 말이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사람의 개념은 장소의존적이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는 그와 같이 물리적으로 분명한 윤곽을 갖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각자의 앞에 상호주관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다. 우리는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받는다... 사회의 경계는 이 나날의 인정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그어진다.

사람의 수행성

고프먼은 사람의 수행Performing person적 차원을 강조한다. 사람을 수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라는 무대에 올라 사람 연기를 행하고, 관객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비로소 사람자격을 성취함을 뜻한다. 이는 사람다움personality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사람다움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태어났거나 사회화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본질같은 게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생겨나는 어떤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는 이 연극을 다른 말로 상호작용 의례라고 부른다.

고프먼은 얼굴(체면,명예)을 유지하는 것이 상호작용의 목표라기보다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상호작용의 목표들은 보통 서로 얼굴을 잃지 않고 또 잃지 않게 하려는 노력속에서 진행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사회 안에서 행위자로서 목표지향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동시에, 사람으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의례를 수행한다.

현대 사회는 구조(지위,자본)의 면에서 불평등한 개인들이 상호작용의 질서(성원권의 인정) 안에서는 평등하다고 가정한다. 즉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자본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으로서 평등하다. 상호작용 의례는 바로 이 점을 확인한다.

상호작용 질서

상호작용 의례를 교환하는 행위에는 단절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모욕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내가 건넨 상호작용 의례에 상대방이 화답해주지 않으면 나는 모욕당한 것이고 상대방은 내 인격을 무시한 것이다. 따라서 각별할 필요가 있다. 인격은 사람다움과 마찬가지로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표현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의례를 통해 사람다움을 인정 받고 사람이 된 것이라면, 더욱이 이 사람다움이 언제든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상호작용에 참가하는 다른 모든 참가자들의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상호작용 의례를 통해서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다. 다시 말해, 그의 안에 있는 '사회적인 것'이다.

고프먼에게 이 인격은, 초기에 사회화를 통하여 개인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어떤것이라기 보다는(인격의 단일성 부정)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표현되고 확인되는 무엇이다.

이런 이유로 고프먼은 의례적 규칙의 준수에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개인은 (사회화를 거쳐서) 일단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남의 도움 없이 계속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사회생활의 모든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람대접을 받음으로써 매번 사람다운 모습을 획득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에 참여하는 개인은 그러므로 다른 참가자들의 사람다움을 확인해주고, 사람이 되려는 그들의 노력을 지지해줄 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역으로, 그는 남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대우해주기를 기대할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나를 해고한 사장도, 월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 할머니도 나를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던건 아니다. 그들은 시장의 법칙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환대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 집 문을 두두리는 모든 사람을 돌어오게 하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한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 (새로 태어난 아기, 이주자 등)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처벌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그의 사람자격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인같이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계속 환대된다.

사회는 개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형벌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위반한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지 않는다. 형기를 마친 사람은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다음 경기에 출전하는 것처럼, 명예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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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가게 되면서 새로운 내 집 환경을 어떻게 조성할 지 많이 고민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었던 건 공부하고 책 읽기에 최적화된 공간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허리통증을 유발하고 타이핑과 필기 병행에 불편함을 초래하는 책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에서, 공부 효율성의 증가는 불 보듯 뻔했으나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새로운 공간에서는 좀 더 나를 통제하고 타이트하게 시간을 활용하고 싶었다. 그래서 습관에 관한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여러가지 책 분야 가운데서도 이 분야에는 유독 '샤이 자기계발서'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는 좀 꺼려지는, 그런 게 있다. 자기계발서의 효능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면서 '나는 자기계발서는 안 읽어'라고 말하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우리를 좀 더 수줍게(shy) 만든다. 그럼에도 나는 내 결핍이 부각되는 때마다 적절한 자기계발서를 찾아 읽어 독특한 효과를 봐 왔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물론 나도 자기계발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이 책도 앞으로의 내 성장에 있어 일정 부분의 지분을 차지할 것 같은, 괜찮은 책이다.

습관이 변화로

저자는 원자 단위의 아주 작은 습관(atomic habit)들이 쌓이고 축적되서 변화와 성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사람이 1년간 매일 1%씩 성장할 경우, 37배나 성장할 수 있다. (1.01<sup>365</sup> = 37.78) 그런데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작은 1%의 변화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인간이 오랫동안 지연적 보상보다는 눈 앞의 즉시적 보상을 좇도록 진화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시멜로를 눈 앞에 두고도 15분을 감내한 아이들이 매사에 더 좋은 성과를 이루어 내지 않았던가. 내가 쏟은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낙담의 골짜기를 지나 임계점을 넘긴 어느 순간부터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러니 변화를 꾀하고 있다면 습관을 잘 형성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 성공으로 가는 경로에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 일어난 결과보다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세상이 날 외면했다고 여겨질 때 나는 석공을 찾아간다. 석공이 100번 망치를 내려치지만 돌에는 금조차 가지 않는다. 101번째 내리치자 돌이 둘로 갈라진다. 나는 그 마지막 타격으로 돌이 갈라진 게 아님을 알고 있다. 그건 그전에 계속 내리친 일들의 결과다. -그렉 포포비치 산하의 San Antonio Spurs 라커룸에 걸린 격언

결과 중심주의를 지양하고, 시스템과 정체성을 가까이

변화를 꾀할 때도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는 변화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해내고자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다. 그러면서 '목표 달성'이라는 결과에만 집착한다. 과정은 도외시된다. 하지만 모든 것은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인 시스템의 문제다.

  • 목표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차이가 될 수 없다. 성공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목표는 같다. 성패를 가르는 건 지속적으로 작은 개선들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 목표 달성은 일시적 변화일 뿐이다. 목표 달성은 원인을 다루지 않고 증상만을 치유한 것이다. 시스템을 개선해야 비로소 완전히 변한 것이다.
  • 목표는 행복을 제한한다. 목표 우선주의는 목표 달성시까지 행복을 유예한다. 반면 시스템 우선주의는 시스템이 잘 동작하기만 하면 언제나 행복하다.

결과 중심의 습관은 지양되어야 한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습관을 변화하고자 하면 지속하기가 어렵다. 그보다는 정체성 중심의 습관을 세워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명확히 하고, 나의 바람을 나의 정체성과 일치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책 읽는 사람이야'라는 믿음과 정체성이야말로 나를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준다. 정체성이 결여된 구체적인 목표는 단기적으론 지켜낼 수 있겠으나 장기적으론 불가능하다. 또한 내가 '책 읽는 사람'이라는 나의 모습에 자부심을 가질수록, 관련된 습관을 유지하기가 수월해진다. 종합하자면, 습관은 정체성에 의해 강화된다.

정체성은 마찬가지로 습관에 의해 강화된다. '책을 조금씩 읽는' 습관이 쌓여서 '책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강화된다. '매일 침구를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서 '체계적인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처럼 변화를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정체성)를 생각해보고, 작은 성공(습관)들로 스스로에게 증명하면 된다. 어떤 결과를 얻어내겠다는 목표 설정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정체성과 습관이 상호 보완적인 요소임을 깨닫고 변화를 기획해야 한다. 둘 중 하나만 자극해서는 쉽사리 변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정체성은 단단한 포석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바꾸고 선택할 수 있다. 오늘 선택한 습관으로 지금 내가 원하는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

실용적인 습관 적용 방법

  • 실행 의도를 갖고 구체적으로 습관을 계획할 것.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지가 명시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저녁 6시에) (내 방에서) (1시간 동안 Node.js를 공부)하겠다.

  • 새로운 습관을 세울 때 습관 쌓기habit stacking를 활용하면 좋다. 습관 쌓기는 '나는 (현재의 습관)을 하고 나서 (새로운 습관)을 하겠다'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때 현재의 습관은 다음 행동을 위한 긍정적인 연쇄 신호가 되어준다.

  • 내가 원하는 습관이 일반화된 집단에 들어가면 금방 변화할 수 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 다수, 유력자의 습관을 모방한다.

  • 습관과 관련된 시각적 신호를 자주 인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클립 전략을 잘 활용하면 시각적 신호와 즉각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나는 (현재의 습관)을 하고 나서, (빈 통에 구슬 하나를 넣을) 것이다'

B = f(P,E)

행동Behavior은 사람Person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Environment간의 함수 관계다

그래서 어떤 습관을 세울거야?

책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요약해 봤다. 변화를 위해선 긍정적인 습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고, 그 습관들은 결과 중심이 아닌 정체성 중심이어야 한다는 게 요지다. 최근 직장에서 주변 동료들에게 '꼼꼼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꼼꼼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자 매사에 좀 더 신경써서 꼼꼼하게 마무리하는 습관이 생기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우선은 '나는 개발자다'라는 정체성을 강화하겠다. '나는 주니어 개발자다'도 좋겠다. 이전까지는 '개발자 지망생' 정도의 정체성을 갖고 안일하게 공부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정체성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정체성에 동기화시킬 수 있는 습관 시스템을 구축한다. 습관은 자존감이고 습관의 이행은 체계적인 생활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개발 뿐만이 아닌 실생활에 관련된 습관들도 형성한다.

  • 7시 기상
  • 침구류 정리
  • 외출하지 않더라도 샤워하기 등

개발 공부에 대한 습관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올 수 있겠다. 자세한 사항은 Notion의 To do List를 통해 개인적으로 관리.

  • 타이머를 활용해 50분간 공부에 집중한 뒤, 구슬을 빈 병에 넣어 시간 관리하기
  • 구슬을 네 번 넣고나면 구슬을 두 번 넣을때까지 일어서서 공부하기 등

이러한 습관들을 준수하면서 '나는 개발자'라는 정체성을 강화해 나가면 취업이나 개발자로서의 실력 향상(또는 연봉향상)이라는 결과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결과는 수단이고 습관 시스템을 준수하는 게 목적이라는 사실을 유념하자. 시스템에 집착해야 행복이 유예되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

열망은 뭔가를 놓쳤다는 데 대한 감각이다. 이는 우리의 상태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이다. 현재 상태와 욕망하는 상태의 차이가 행동의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