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huck

2021.11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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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에 없던 미술관에 갈 일이 생겼다. 그저 멍하게 걷기운동만 하고 돌아오는 안타까운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초현실주의와 살바도르 달리를 중심으로 관련 책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손에 잡히는 서양 미술사

도서관 미술사 코너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선정한 책이다. 우선, 두꺼운 책은 피했다. 곰브리치라던가 진중권이라던가 얼핏 들어본 유명한 저자의 미술사 책은 하나같이 4~500p 두께에다가 시대별로 구분하여 6권 정도나 되는 볼륨을 자랑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깊게 파고드는 책을 골랐다가는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갈게 뻔했다.

책의 두께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은, 인물이나 작품 중심의 미술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화가가 어느 작품을 만들었고 그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시대정신 같은 게 궁금했다. 어떠한 배경에서 인상주의니 낭만주의니 하는 한 시대를 주도했던 -ism이 발생했는지가 궁금했다.

이렇게 거르다보면 요구사항을 충족하는 책이 몇 남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을 고른건 작가가 서문에 밝힌 집필의도가 나의 바람과 꼭 들어 맞았기 때문이다.

여러 관점들이 있을 수 있지만, 우선 미술 작품이란 예술가 개인의 성향뿐만 아니라 그 시대나 사회의 문화적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예술가의 문제의식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과 그가 살았던 시대나 사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적으로 사회가 어떻게 변했고, 문화에는 어떤 영향이 있었으며, 미술 작품에는 어떤 조형적 특징들이 나타났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개인적인 취향은 르네상스풍의 조각 작품들이었다. 아무래도 무지랭이다보니 딱 봤을 때 직관적으로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라는 경외감이 드는 작품들이 마음에 들었다. 로코코 양식의 소소한 일상 풍경을 아늑하게 그린 회화들도 좋았다. 반면에 추상 미술은 불호였다. 대상의 본질적인 속성만을 추출하여 묘사한 것이라곤 하는데, 와닿지가 않는다. 미술사적으로는 시각을 넓힌 기념비적 분기점일 순 있겠으나 내게는 난해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미술사를 훑으며 느낀것은 어떤 학문이든 느슨하게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가령 고대 이집트의 벽화와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 조각품에는 정교한 측량술과 수학적 기법들이 동원되었고, 중세시대의 대부분의 미술작품들은 철저하게 종교적 목적을 갖고 종교적 상징을 띄게끔 제작되며 종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프리즘의 발명과 광학 이론은 예술가들이 빛과 색을 다른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철학으로 대변되는 당대의 사유는 언제나 예술계에 반영되거나 예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식으로 작용했다.

미술사를 살펴본 경험은 고립되어있던 점 몇 개에 선을 그어서 점과 점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과 같았다.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미술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나는 미술에 관심 없어'라고 고집스레 견지하던 태도를 버리고 좀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각각의 분야에서 동떨어져 있던 지식들을 한 데 모아 결합하고, 축적해서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체험을 자주 겪을 수 있도록 편견을 버리고 관심사를 넓히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달리 나는 세상의 배꼽

달리의 생애를 정리한 책이다. 가볍게 읽기 좋았다.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형이 어린 나이에 급사하지 않았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 운명이다. 달리는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부여받았고, 달리의 방에는 부활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사진과 죽은 형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한다. 마치 달리를 죽은 첫째 아이의 재림이라고 여기는 듯이. 달리의 부모는 참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던 것 같다. 유년시절부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당하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일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부모에게서 말이다. 여러모로 한강 작가의 <흰>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나를 두고 네 어머니 펠리파는 너의 방에 그리스도의 사진과 네 형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두었다. 그것이 아마 너를 극도의 신비적 혼란에 빠지게 하고 너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던 것 같구나. 결국은 그것이 너에게 콤플렉스가 되었고. 펠리파는 어린 너에게 "너의 형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귀의하였노라."하고 들려주곤 함으로써 너를 더욱 혼란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지.